“게임 개발은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는 작업, 게임은 작가를 비추는 창”
“개발자는 스스로를 향한 질문을 멈추지 않아야…”
[게임이란?]
재미, 놀이, 시간 때우기, 스트레스 풀기…
화려한 그래픽, 짜릿한 액션, 탄탄한 스토리…
쏘고, 사냥하고, 아이템을 얻고, 레벨을 올리고, 퀘스트를…
[게임 사업이란?]
돈이 되느냐? 타겟층이 누구냐? 장르는? 개발비는?
시장분석, SWOT, STP 전략과 IMC는 어떻게? 해외 시장은?
게임을 좋아하는 유저나 게임을 개발하고 서비스하는 업계 종사자라면 누구나 피해 갈 수 없는 질문과 답변 들일 것이다. 특히 대기업이 전체 규모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작금의 게임 시장에서 ‘성공’, 아니 ‘생존’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노력해야만 하는 개발자의 입장이라면 더더욱 공감할 수밖에 없는 키워드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1인 개발자 Somi는 이러한 천편일률적인 기획과 개발에서 벗어나 게임을 통해 자신이 말하고 싶은 삶의 가치관을 담고, 게이머들과 함께 공감하고, 토론하고자 노력해왔다. 상업적인 ‘수치적 접근’에서 벗어나 인디게임만이 표현할 수 있는 주제의 자율성을 누구에게도 구속받지 않고 고스란히 게임에 담아내 온 그의 철학과 이야기를 들어보자.
현실에서 일어나는 정치, 사회 문제에 대한 고찰
개발자 Somi가 2016년에 출시한 대표작 ‘Reflica(레플리카)’는 게이머가 주인을 알 수 없는 휴대전화를 들고 소셜미디어 계정, 메시지, 사진 등을 염탐하면서 테러의 혐의점을 찾아가는 추리 형식의 게임이다.
개발자는 본인이 좋아하던 소설 ‘재능 있는 리플리’의 주인공에 영감을 받아 기획을 시작했지만, 개발 당시 나타났던 사회적 시대상을 반영하여 소재를 바꾸게 되었다. 정부 정책을 비판하던 사람들이 블랙리스트에 등재되어 탄압을 받고, 국가정보원에서는 무고한 시민을 간첩으로 둔갑시켜 억압했던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던 시절, 정부는 이탈리아 범죄조직으로부터 사이버 무기를 수입했고, 당시 여당에서는 합법적인 감시와 통제의 권한을 목표로 테러방지법을 발의하기도 했다.
“방관자 = 공범”, 스스로에게 되뇌는 죄책감을 게임으로 표현
개발자 Somi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자신의 삶과는 직접적인 영향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아무 탈 없이 잘 먹고 잘 살아가는 본인의 모습에 대해 많이 고민했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은 거리에서, 국회에서, 그리고 생업의 현장 안에서 민주주의와 정의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데, 아무런 목소리를 내지 않으며 오히려 시끄럽다고 느끼는 스스로에 대해 ‘나는 사고능력을 잃었나?’, ‘나는 그들과 공범인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고, 이러한 사회 문제에 대한 방관자적 입장에서의 죄책감을 표현하기 위해 게임을 개발하게 된 것이다.
죄책감 삼부작의 시작 ’Replica(레플리카)‘
게임의 도입부는 주인공과 그의 친구가 국가정보기관에 의해 감금되어 있고, 서로의 휴대전화를 들고 있는 상황이다. 본인의 무고함을 입증하기 위해 자신의 친구가 테러범임을 먼저 증명해야 하는 형식으로 게임은 진행된다.
주인공은 현재 상황에 대해 아무런 정보가 없는 상태로 시작되며, 이후 국가정보기관 직원의 문자 메시지를 통해 철저히 유저 스스로의 양심에 따른 선택과 판단으로 게임은 전개된다.
결국 ’레플리카’는 테러 용의자로 지목된 주인공과 무고한 고교생 친구 중 후자가 실제 테러범으로 밝혀지면서 비극적 엔딩을 맞이한다. 개발자는 게임 출시 후 유저들로부터 게임의 주제가 정부의 억압이나 통제를 비판하기 위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결말이 과연 맞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개발자 Somi는 이 게임을 통해 선과 악을 규정하려한 것이 아니며, 대의와 명분 안에서 인권과 절차를 무시하고 개인을 탄압한 뒤 결국 범인을 찾아냈다고 하더라도, 과연 그 과정 속에서 자행된 검열과 악행까지 정당화될 수 있는지? 결과만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올바른지에 대한 가치관과 의문점, 본인이 느꼈던 죄책감을 전달하고 싶었다고 한다.
정치적인 의미를 담은 탓에 일부 게이머들로부터 ‘빨갱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던 ‘레플리카’는 출시 후 국내외 인디게임 관련 단체에서 다수의 게임상을 수상했으며, 해외 시장의 경우 오히려 중국 등 공산국가에서 괄목할 만한 실적을 거둬 큰 이슈가 되기도 했다.
실적 만능 시대가 빚어낸 사법 체제의 부조리 ‘Legal Dungeon(리갈 던전)’
‘레플레카’ 이후 출시한 ‘리갈 던전‘은 사법 체제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게임은 유저가 경찰이 되어서 수사보고서를 작성하는 형식으로 진행되며, 총 8개의 형사 사건을 통해 7에서 40페이지에 달하는 수사보고서를 읽고 기소 여부를 결정하는 내용이다.
’리갈 던전‘의 경우 수년 전 국내 모 경찰서에서 자행되었던 경찰관들의 독직폭행 관련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개발되었다. 이들은 무고한 사람을 체포해서 범행에 대한 자백을 받았고, 그 과정에서 고문한 사실이 밝혀졌으며 더욱 놀라운 점은 한두 사람이 아닌 팀장을 포함한 형사팀 전원이 함께 범죄에 가담했다는 점이다.
개발자는 ’과연 무엇이 사람들을 이렇게 만들었을까‘라는 고민에서 출발했으며, 당시 경찰서장의 인터뷰를 통해 이 사건이 실적주의가 빚어낸 시대의 비극임을 깨닫게 되었다. 가령 살인자를 체포하면 15점, 절도범을 체포하면 2점의 점수를 얻는 방식. 몇 년 뒤 해당 사건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서서히 잊혔으나 당시 발생한 실적주의 행정은 전국으로 확대되어 여전히 경찰관들의 활동에 대한 바로미터가 되고 있다. 경찰관들의 승진, 연봉 등 각종 인사 정책 모두가 이러한 실적 중심의 성과 등급으로 구성되고 있다는 이야기다.
일부 경찰관들이 절도범 검거실적을 높이기 위해 폐지를 줍는 노인들을 무더기로 검거하거나, 길에 쓰러진 사람을 발견해도 바로 구하지 않고 절도범, 털이범을 잡기 위해 오히려 미끼로 활용하는 세상. 개발자는 게임을 통해 사람들에게 묻고 싶었다고 한다. 동일한 제도 안에서 당신이 경찰관이 된다면 과연 다른 선택을 할 수 있겠느냐고.
이러한 모티브안에서 게임은 플레이어가 방대한 수사서류를 통해 유의미한 정보들을 재조합해서 새로운 구조를 만드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게이머가 단서를 찾아서 선택하는 매 순간순간이 서사를 변화시키도록 만들었고, 이를 통해 게이머는 자신이 완성한 수사 결과가 현실의 경찰과 얼마나 다르고 같은지를 비교 체험할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2년 넘게 이 게임을 제작하면서 개발자는 개발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과 슬픔을 겪었다고 한다. 실제 발생했던 사건들과 판례들을 기반으로 제작한 까닭에 어쩌면 개발자 본인이 타인의 고통을 개인의 창작활동에 소비하는 것은 아닌지, 이러한 행위가 또 다른 2차 가해는 아닌지, 특정인을 피해자로 정의함으로써 이러한 사람들에게 또 다른 낙인을 찍고 범죄에 취약한 계층이라는 편견을 만들게 되는 것은 아닌 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에 개발자 Somi는 적어도 게임 속 피해자들의 고통이 헛되지 않도록 하는 게임을 만들겠다고 다짐했으며, 이 게임을 통해 게이머들이 한 번쯤은 피해자들의 고통, 범죄의 위험성과 범죄를 다루는 제도의 불합리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리갈 던전’은 출시 후 게임을 플레이한 현직 경찰관으로부터 이 게임이 중앙경찰학교에서 신임 경찰들의 교재로 쓰이면 좋겠다는 의견을 받기도 했다. 게임에서 다소 부정적으로 묘사된 경찰이 오히려 이 게임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해 주는 것 같아서 개발자는 매우 뿌듯했다고 한다.
비주류와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편견과 혐오,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이야기
’The Wake(더 웨이크)‘
‘더 웨이크’는 일기장을 통해 할아버지에서 아버지, 아들로 대물림되는 애증의 역사를 다룬 게임이다. 일기장에는 할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마주친 아버지의 이야기, 주인공이 아버지를 만남으로써 어린 시절의 아픔과 감정들이 다시금 되뇌어지는 내용을 다루고 있으며, 일기장에 암호로 감춰진 작성자의 고뇌를 찾아보고 가족에 대한 모순된 감정을 이해하게 된다는 줄거리가 전개된다.
‘더 웨이크’는 주류나 정상으로 규정된 범주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그들에 대한 편견과 혐오,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 등을 이야기하고자 제작된 게임이다. 개발자는 당시 사회 전반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었던 주제들로써 이러한 주제를 다뤄 달라는 팬들의 요청이 많았으며, 자연스레 성소수자, 젠더 등에 대한 이슈를 다루게 되었다고 한다. 아울러 이 게임을 통해 개인적으로 겪었던 본인의 행복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과 그로 인한 상처, 두려움, 현재까지 바뀌지 않고 있는 생활방식 등에 대한 내용도 게임에 담아냈다고 한다.
개발자 Somi는 출시 후 게임의 유저 리뷰를 읽으며 새로운 경험을 겪었다고 한다. 통상적으로 게임 리뷰라 함은 ‘갓겜’, ‘똥겜’, ‘재미가 있네, 없네’ 등이 일컬어지게 마련이지만, ‘더 웨이크’의 경우 게임에 대한 평가는 배제되고 게이머 각자의 추억과 경험,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고 한다. 국내외 자원자를 대상으로 베타 테스트를 진행했던 이 게임에서 테스터들은 고쳐야 할 점, 수정해야할 점 등에 대한 언급보다 개인적인 과거사들을 이야기했다.
개발자 Somi는 게이머들 각자의 인생이 담겨있는 리뷰를 읽어보면서 ‘난 창작자’, ‘넌 감상자’라는 기본적인 구분이 사라짐은 물론 둘 사이의 경계가 무너지고 상호 교차된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유저의 리뷰 하나하나가 진솔한 느낌의 문학적인 수필이라는 생각까지 들었으며, 몇몇 테스터들이 공유한 그들의 아픔에 대해 한참을 읽고 또 읽으며 그들에게 매우 감사하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더 웨이크’에는 작가가 그린 이야기가 있고 게이머들이 남겨준 이야기가 있으며 서로가 가진 이야기가 합쳐져서 또 하나의 새로운 작품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으며, 이를 통해 가장 개인적이지만 가장 보편적인 것이 게임이고, 게임을 통한 공감과 연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게임 개발은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는 작업, 게임은 작가를 비추는 창”
“개발자는 스스로를 향한 질문을 멈추지 않아야…”
개발자 Somi는 죄책감 삼부작을 개발하면서 본인이 관심을 두고 고민하던 주제들, 속해 있던 국가, 사회, 직장 등에서의 면면과 단상들을 게임이라는 매체를 통해 표현하고자 했으며, 사회적 부조리와 구조적인 불평등, 그로 인해 소외된 사람들, 이러한 상황들 속에서 본인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하지 않고 방관하는 죄책감을 제작의 계기로 삼았다고 한다.
반공과 애국으로 위장한 악을 쉽게 인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선으로 위장한 테러와 분노로 인해 혼란을 겪는 현실. 이러한 불분명한 경계 속에서 유저 스스로에게 죄책감을 깨닫게 하고 ‘과연 나는 선량한 사람인가’라는 의심을 겪게 함으로써 다시 한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Somi는 게임 제작이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구체성과 통일성을 잃지 않으려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제작자의 독자적인 세계관 안에서 세계가 움직이는 규칙이 만들어지고, 그 안의 생명들에게 인격과 서사를 부여하는 작업 역시 제작자 본인이 가지고 있는 사상과 가치관이 그대로 투영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결국 본인이 가지고 있는 혐오와 편견 또한 함께 가지고 가게 되는 것이다.
“주변에서 ‘나는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을 차별하거나 혐오한다’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의도하지 않은 혐오와 편견, 무시… 이런 것들로 피해를 보는 사람은 정말 많다. 본인이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아닌가라는 점을 인정하고 본인이 만든 게임이 누군가에게 고통을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해 더 많은 고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개발자가 더 많이 공부하고, 더 많이 고민하고, 스스로를 향해 질문하고 깨닫는 과정이 반복됨으로써 본인이 부끄럽지 않은 사상과 철학을 가지는 것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것들이 진정 우리가 문화라고 얘기하는 좋은 게임을 만드는 가장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방법이 아닐까 싶다.”